'익숙함'과의 결별하며 그녀를 맞이하다.

  서울에서 10년을 살았다.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누군가가 서울의 지하철 노선을 물어보거나, 강남과 홍대, 대학로와 같은 곳에서 길을 물었을 때, 물음에 답할 수 있다고 해서 서울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울의 깊은 곳. 겹겹이 쌓인 서울의 나이테, 그 안쪽을 들여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울을 '익숙하다'고 느꼈을 때, 호기심은 사라졌다. '익숙하다'는 것은 우리 삶에 편안함을 안겨주지만 가끔은 '익숙함'을 버려야 할 때가 있고, 나는 영국 출신의 그녀를 만나면서 '익숙함'을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울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서울은 참으로 흥미로운 장소이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Bishop). 많은 사람들이 '비숍 여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서울을 4번 방문했고, 한 권의 책(여행기)을 남겼다. 책의 이름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그녀의 이야기는 1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높은 빌딩들을 가로지르는 휴식 공간으로 각광 받고 있는 '청계천'.

물이 흐르는 주위로 나무들이 자라서 도심 속 휴식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20년 전, 그녀는 '청계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울의 (볼 만한)'광경' 중 하나는 개천이다. 복개되지 않은 이 개천을 따라 검게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고 있다. 

사람들에 시달려 지친 남자들은 물을 길어 통에 담거나 악취 나는 물에서 옷을 빨고 있는 하층 계급의 여인들을 바라보며 기분을 전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땅한 하수 정화 시설이 없던 시절, 청계천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지만, 깨끗한 공간은 아니었다. 


사진은 영풍문고 입구 '광교 사거리'.

'영풍문고'자리에는 대한제국 시절, 최초의 근대적 민간 은행인 '한성은행'이 있었다.

'한성은행'은 조흥은행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에 흡수 합병 되었다.


- 종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서울의 중심'이라 불릴 만 한 곳.

 

 종로는 조선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서울의 중심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최근들어 크게 각광받고 있는 강남과 달리 '종로'에 대한 이야기는 옛 문헌이나 문학 작품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종로'는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장소인만큼 많은 볼거리와 할 거리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보신각(普信閣)과 보신각 종

△ '종로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보신각 종'이 있는 '보신각'이다.

보신각의 입구는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신각 종'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보신각의 2층 종루에 '보신각 종'이 걸려있다. 

둔탁하지만 묵직하게 울려퍼지는,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가 듣고싶어진다. 


  종각역 4번 출구. 보신각은 많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된다. 보신각 종은 '종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지금은 매년 12월 31일 자정, 33번 종소리를 울리며 한 해의 끝을 알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종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는 하루에도 여러번 종이 울려퍼졌다. 비숍 여사는 '보신각 종(옛 보신각 동종,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선의 여인들은 매우 엄격하게 격리되어 있으며, 다른 어느 나라의 여인들보다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서울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신기한 제도가 널리 보급되었다. (저녁) 8시경이 되면 '거대한 종'이 울리는데, 이는 남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호이며 그제야 여인들이 밖에 나가 즐기며 그들의 친구를 방문한다. 캄캄한 거리에는 등롱을 든 하인을 거느린 여인들의 무리가 북적거린다. 다만, 눈먼 사람, 공무원, 외국인의 하인과 약제사에게 처방을 받은 사람은 이러한 규정에서 면제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긴 지팡이를 짚고 장님 시늉을 하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고나서 12시에 다시 종이 울리면 여인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남자들이 자유롭게 밖으로 나간다. 어느 지체 높은 가정의 부인은 결코 낮에 서울의 거리를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날이 밝으면 지체없이 종소리는 울려퍼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날이 밝아도 종소리는 울려퍼지지 않는다. 종소리가 없는 대신 누구나, 어느 시간에나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종로의 밤은 언제나 화려하게 빛난다.

 그런데 '보신각 종'이 걸려 있는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은 의문을 가질 법한 이름이다. 누각이라는 의미의 '각(閣)'은 1층 짜리 건물에 쓰이는 명칭인데, '보신각'은 2층이다. 2층짜리 건물에는 '루(樓, 다락)'를 써야한다. 다시 말 해, 종로의 '보신각'이 아니라 '보신루'라고 해야 정확한 것이다. '보신루'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을 '보신각'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때부터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만큼, '종루'로 크게 지어진 '보신각'은 온갖 수난과 고초 속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단층 건물'로 지어졌고 고종 때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그 후, '한국 전쟁(6.25전쟁)'때 전소된 뒤, 1979년에 튼튼한 2층 짜리 시멘트 건물로 지은 뒤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보신각 앞에는 '수준점'이라는 작은 돌이 있다.

'수도권 고속 전철  수준점. 1970.10.30'이라고 적힌 작은 돌은, 수도권 전철(지하철) 깊이의 척도가 되는 원점이다.

종로의 '수준점'을 기준으로 지하철 선로와 역사의 깊이가 가늠된다.

 

△ 종로타워 앞쪽(왼쪽 사진)과 종로타워의 뒤쪽(오른쪽).

종로 타워에도 고층 빌딩들이라면 으레 놓아 두는 공공 조형물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앞쪽'이 아닌 '뒤쪽, 주차장 입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찾아가서 보지 않는다면 발견하기 어렵다.

'황금탑 세기의 선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종로타워의 공공 조형물은,

국내 유명 작가 중 한 사람인 '최정화'작가의 작품이다.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모티브로 여러 탑을 섞어서 만들었다.

하늘을 향해 층층이 솟아 있는 탑의 모습이 '종로타워'와 잘어울린다.


 보신각이 마주하고 있는 높은 건물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꽤나 유명하다. '종로타워'로 불리는 이 빌딩은 위쪽 8개 층이 비워져 있어 미적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있다. '비어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세계적인 건축가로 불리는 '라파엘 비뇰리'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 빌딩은 종로의 수 많은 빌딩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이 있다. 연인과 함께 그곳에서 식사를 한다면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피맛골'을 지나 '탑골공원'으로.

△ 피맛골은 종로타워 뒷길에서 시작되는 '피맛골'은 '인사동'으로 연결된다.

인사동의 골목에는 소소한 볼거리들과 먹거리들이 많이 있다.

종로 대로변에 접해있는 인사동 초입 건너편에 '탑골 공원'이 있다.


   종로의 대로변은 예나 지금이나 큰 길이었고, 지금의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우체국'과 '청계천'을 지나 남대문으로 이르는 길은 '넓이가 넓은 큰 길'이었기 때문에 왕의 행차(거둥,擧動)에 이용되기도 했다. 비숍 여사는 (마지막이었을) 왕의 행차를 볼 기회를 가졌고, 왕의 거둥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외국인들이 'South Street'라고 부르는 웅장한 거리를 처음 보았다.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왕을 밝혀 주기 위해 거리를 따라 20야드 간격으로 10피트 높이의 횃불이 세워졌다. 이 거리가 행사장으로 쓰이는 것은 단지 그 위풍당당한 넓이 때문이다"


 종로의 큰 길은 주로 말과 마차와 같은 것들이 주로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들을 피해 종로의 대로 뒤쪽 '골목길'을 주로 이용했고,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보니 여러가지 상점들과 음식점들이 생겨났다. 그곳이 바로 종로타워 뒤쪽으로 가면 볼 수 있는 '피맛길(피맛골,避馬길)'이다. 지금은 '피맛골'로 알려진 이 골목들을 지나면, 서울의 유명 관광지로 잘 알려진 '인사동'이 나온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탑골 공원'이 있다. 영어로는 'Pagoda Park'로 불리는 '탑골 공원'에는 유명한 탑이 하나 있다.


△ 종로 타워 옆의 샛길로 들어오면, 피맛골로 갈 수 있다.


△ 종로타워 뒤쪽으로 '피맛골'이라고 불리는 골목길이 있다.

청계천 방향의 '종로 젊음의 거리'의 세련된 느낌과는 상반되는, '인심'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는 골목이다.

'피맛골'의 '피마(避馬)'는 '말을 피한다'라는 뜻이다.

즉, 종로 대로변에는 말을 탄 사람들이 많이 다녔고, 이들을 피해다니기 위해 사람들이 '대로변 뒷길'을 이용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말을 피해서 다닌 길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 '피맛길'이고, 지금은 '피맛골'이라고 불린다.


  탑골 공원은 서울 최초의 시민 공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한 '최초의 공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것은 '탐골 공원'을 두르고 있는 '담장'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탑골 공원은 일반적인 '공원'과 다르게 '담장'을 두르고 있는데, 이 담장은 일제 시대 때 3.1운동을 진압한 일본이 공원의 접근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담장을 둘렀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탑골 공원은 '최초의 공원'이라는 것 말고도,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대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있는 공간이다. 탑골 공원에는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고, '보물 제3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가 있는 곳인 동시에 1919년 3.1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가 낭독 되었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탑골 공원은 고종 때(1897년)지어졌는데, 그 이전까지는 그 자리에 약 200여 호의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민가들은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대원각사비'를 둘러싸고 있었고, 어린 아이들은 탑에서 부조를 떼어내고, 비석 위에 올라서서 놀았다고 한다. 조선 세조때 지어진 '원각사(1464년)'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갖은 수난을 당하며 절 터와 탑과 비석만 남겨 놓았고, 지금은 '공원'이 된 것이다.


  비숍 여사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 5번이나 방문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700년이 된 대리석 탑이 이 도시의 불결하고 좁은 길가에 있는 건물의 뒤뜰에 완전히 숨겨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없다. 나는 그 탑의 양각 세공의 사진을 몇 장 찍고 싶었기 때문에 다섯 번이나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로웠다. 그러나 탑이 있는 곳이 너무 비좁기 때문에 담 위에 올라가야만 겨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모든 부분에 조각이 새겨져 있고, 평평한 부분의 조각은 더욱 아름답다. (중략) 탑은 13층인데, 3개는 3세기 전 일본 침략때 없어졌고(임진왜란), 나머지는 손상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 있던 부분은 나의 지난번 방문 때에는 아이들이 정교한 조각을 떼어 내어 팔고 있었다."

  

 그녀는 탑 주위에 늘어선 가옥들 때문에, 높은 탑의 제대로 된 모습 사진을 남길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탑을 파괴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탑을 파괴하는 사람이 없이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탑'의 아름다운 조각을 제대로 관찰하기는 힘들다. 탑이 유리로 된 관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보존'을 위한 '유리관'은 탑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게 한다.


 

△ 탐골 공원의 입구.

탐골 공원은 정문격인 '삼일문'과 동문, 서문이 있다. 서문은 '인사동' 방향이다.

'삼일문' 현판의 글자체는 '독립선언서'에 나온 글자에서 그 모양을 따왔다고 한다.

△ 삼일문 안으로 들어서면, '기념 공원'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탑골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는 것은 널찍한 공간을 앞두고 서 있는

'3.1운동 기념비'이다. 이 기념비는 1980년에 제작되었다.


△ 좀 더 안쪽으로 가다보면, 소나무 사이로 '팔각정'이 보인다.

'팔각정'은 '탑골공원'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팔각정에 닿기 전, 오른편에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를 볼 수 있다.

거북이 받침대 위에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탑골공원이 생기기 전, 이 비석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기구 처럼 이용되었다.


  

△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뒤쪽에서 보면, 꼬리가 특이하게 조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대원각사비'에 대한 설명을 유심히 보는 모습이 눈에 띈다(오른쪽)


△ 탑골 공원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팔각정'.

'팔각정'에서 3.1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지금은 그때 그 울림 대신, 탑골 공원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쉼터로 역할을 하고 있다.

뒤편, 유리관 속에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국보라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비숍 여사는 이 탑을 보기 제대로 된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5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대리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부조)는 가히 '국보급'이라고 할 만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 힘들다.

유리관은 2000년에 만들어 진 것인데, 탑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은 그 특성상 마모/부식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비둘기 똥과 비바람, 우박 등으로부터 탑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 탑골공원의 삼일문, 사람들을 주로 삼일문을 통해 탑골공원을 드나든다.

보신각에서부터 탑골공원까지,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둘러보다보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비숍 여사의 여행기에 기록된 서울, 종로의 거리는 악취가 풍기고 위생적이지 못한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골목에는 오물과 쓰레기, 오폐수가 흘렀다고 한다. 지금의 종로 거리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풍경이다. 또한, 앞서 소개했지만 청계천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청계천은 삶의 터전이었지만, 그리 깨끗한 곳은 못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쾌적한 환경으로 바뀌었고, 청계천과 탑골공원은 도심 속에서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가난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비숍 여사와 함께 서울 거리를 걷다보니, 서울이 좀 더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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