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와 삶'에 대하여.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막대한 부를 쌓은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제국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강대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우수한 문화와 문명의 전파'를 명분으로 삼았다. 일본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미개한' 민족을 도와준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문화 절대주의'라고 부르는, 우월하다고 불리는 것을 추종하고 그 밖의 것은 없애고, 바꿔야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문화 절대주의'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각각의 민족과 사회, 문화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상대적'입장에서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이것은 '문화 상대주의'라고 불리며, 각각의 개인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집단, 사회, 국가, 문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문화 상대주의'라는 현대 사회에서 문화를 바라보는 보편적 가치를 잘 수용하고 있을까?


△ 이른아침, 갠지스 강변의 가트에 모여 하루를 여는 사람들.

아이들은 물 속에 들어가 물장구 치고, 여인들은 빨래를 한다.


2. 바라나시의 갠지스강(Ganges).

 두 달간 인도 북부 지방을 여행하면서, 바라나시(Varanasi/Banaras)에만 3주 정도 머물렀다. 한 번은 일주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바라나시를 떠났지만, 나는 결국 바라나시로 돌아갔고 인도를 떠나기 전까지 바라나시에 머물렀다. 무엇이 나를 바라나시로 가게 했으며, 왜 나는 그곳에 머물렀을까?


△ 바라나시 역


  2박 3일 간의 기차 안 생활. 시간에 대한 관념이 무뎌질 쯤 도착한 바라나시 역. 그곳에 널부러져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많은 사람들을 빠져나오면 릭샤꾼들의 호객 행위가 시작된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따라 '인도의 젖줄'이자 '성지'라고 불리는 '갠지스 강'가로 향하다 보면 바라나시의 혼잡함을 느낄 수 있다.

  대도시라고는 하지만, 큰 도시가 갖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있고, 흙먼지가 흩날리다 못해 자욱히 자리잡고 거리. 거지줄 처럼 얽혀 있는 시장 골목, 그 사이사이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좁은 골목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소와 소똥. 인도의 모든 것이라 할 법한 것들을 갠지스 강이 품고 있었다.


△ 릭샤를 타고 갠지스 강변에 있는 숙소로 가는 길.

흩먼지 흩날리는 혼잡한 거리. 흔한 인도의 풍경이다.


 갠지스강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수 많은 가트(Ghat)들. 그 가트들은 하나하나 의미를 갖고 있지만, 3주를 머물렀던 나는 숙소 주변의 가트를 제외하곤 아직도 그 가트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가트들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 동시에, 그 의미에 따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다시말해, 갠지스강과 가트는 하나인 셈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나 할까?



 

△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갠지스 강변(위)

조각배를 타고 바라본 갠지스 강변의 가트(아래)


3, 갠지즈강은 삶을 담고 있다.

  이른 아침, 갠지스 강변 가트에 나가보면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 사람들, 바라나시의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강물에 몸을 담근 사람들 사이로 더러는 빨래를 하고 있기도 한다. 가트 주변에는 관광객들이 햇살에 반짝이는 갠지스 강과 강물 속에서 몸을 씻는 인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더러는, 조각배를 타고 갠지스 강 위에서 일출을 감상하며 갠지스 강의 아침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 이른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은 배를 타고 강 위를 떠다닌다.

해가 떠오를 즈음부터, 바라나시의 사람들은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보기에는 차가워보이는 강물이지만, 아늑하다고 느껴질 만한 온기를 품고 있다.


 사람들이 몸을 씻고 있는 가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의식이 진행되기도 한다. '힌두교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은 '생명'의 강이다. 갠지스 강변의 화장터에서는 시체를 불태우며, 타고 남은 시체의 잔해를 '강물'에 뿌린다. 그로써, 한 사람의 생이 마감되는 것이다.


 강의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몸을 씻고, 강의 다른쪽에서는 시체를 불태우고 그 재를 강물에 뿌리며, 또 다른쪽에서는 빨래를 한다. 심지어, 소들도 강물 속에서 헤엄치며 뜨거운 태양아래 달궈진 몸을 식힌다. 갠지스 강은 인도, 바라나시의 모든 삶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갠지스 강의 한쪽에서는 죽은 사람의 '화장'이 이루어 지고 있다.

화장터 주변에 불을 지피기 위한 나무들이 쌓여 있다.

나무들을 쌓아놓고, 그 위에 시체를 올린다. 

그리고 불을 붙이고, 불이 꺼지고 나면 그 잔해를 강에 띄운다.


△ 강물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위쪽에 소들도 몇 마리 보인다.(위)

이른 아침 강가에 나와서 한 빨래를 걸어 놓은 모습(아래)


4. 내가 갱지스 강에 들어간 이유.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 불현듯 '갠지스 강'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길로 수건과 티셔츠 하나를 챙겨들고 가트로 향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려는 시간,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나는 가트 한켠에 들고 나온 물건을 놓아 두고 한쪽 발을 강물에 담갔다.

 강물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발을 깊숙히, 쭉- 집어 넣었을 때, 발가락과 발등 사이로 미끈한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강물 속에 가라않아 있는 부유물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내 발을 감쌌고, 다른 한쪽을 물속에 마저 집어 넣었다. 

 강물 안팎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갠지스 강물과 늘 함께하던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들 시선 속에서 나는 '의아하지만 환영한다'는 메시지 읽었다. 내가 갠지스 강물 속에 머리 끝까지, 완전히 몸을 담갔다가 잠시 후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나에게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나에게 물장구를 쳐 주었다. '환영한다'는 의미였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단지 우연이었을까. 바라나시에 왔을 때부터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숙소의 샤워실에서 샤워를 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상쾌함이 나를 휘감았다.


△ 갠지스 강물 속에 몸을 담갔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포근하고 아늑했다.

끈적끈적한 부유물이 내 발을 감싸는 것이 처음에는 꺼림칙하게 느껴졌지만, 곧 익숙해 졌다.

머리끝까지 강물 속에 집어 넣었다. 거짓말같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나는 갠지스 강가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강물에 들어가기 전까지 '강의 의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곳은 단지 풍경이었다. 그러나, 강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로는 '풍경'이 아닌,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나시에 가기 전이었을까, 바라나시에 도착해서 였을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도'를 여행한 한 일본인이 쓴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그는 "바라나시에 가면, 갠지스 강에 들어가라"라고 말했다. 한편, 관광 안내서나 가이드북에는 "갠지스 강에 절대 들어가지 말것. 갠지스 강은 오염이 심각한데, 대장균 박테리아가 기준치의 최소 50배 이상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끌림'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나는 무언가에 홀려 강물에 들어갔던 것이다. 내 마음 한켠에는 이런 생각도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도하고 그 물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내가 거기에 들어간다고 해서 위험할 건 없잖아?"


  갠지스 강과 함께 살아가는 인도 사람들. 그것이 바라나시의 삶이고 문화라면, 그것은 결코 더럽고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 강물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다.


 

△ 갠지스 강. 단순히 보면, 오염된 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 사진을 찍기 위해 올라간 건물 위,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던 꼬마.


△ 바라나시의 골목길을 헤메다가 만난 사람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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