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비[雨, Rain], 그 지루함의 끝은 낭만.

  여름, 지루하게 비가 내린다. 가끔씩 억수같이 쏟아지고, 아파트 사이사이를 흐르는 작은 천(川)은 금새 흘러 넘친다. 삼삼오오 모여 천(川) 안에서 놀던 오리 가족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여름 휴가를 떠났을까]. 창 밖으로, 빈틈없이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다보면 가끔씩 빗속을 걷고 싶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박흥식, 허진호 감독.

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어쩌면 정신나간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시련을 당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정말 지루함을 떨쳐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면서, 특히 여름에 많은 비를 만나야 하는 것은 좋은 것일 수 있다[비를 맞고나서도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봐 왔던 많은 영화들에서 비는, 슬픔을 대신 말해주었고 비는, 우연을 말해주었고 비는, 운명을 보여주었고 비는, 낭만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 <접속(1997)>에서 어떤 우연을, 영화 <동감(2000)>에서 어떤 비극적 운명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는 사랑을 속삭였고, 영화 <클래식(2003)>에서도 비는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비'는 우리에게 어떤 낭만적 만남과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걷고 있으면 누군가 나타나서 우산을 씌워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며 어떤 '운명적 만남'을 조심스레 기대해 보기도 한다. 이처럼,


 '비'는 지루함이 아니라, '낭만'이 될 수 있다.




2.이지 않는 '비'가 전해주는 즐거움.

  마른 땅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 촉촉한 물기가 메마른 땅을 적시며 흙 속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흙 내음이 살며시 우리의 콧속으로 스민다. 이 순간 '흙 냄새' 좋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

비오는 거리, 2013

다. 오랜만에 찾아온 빗방울이 메마른 대지를 적실 때, 우리는 갑작스레 찾아온 흙 내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가끔은 빗방울이 똑, 똑, 똑, 똑, 떨어질 때가 있다. 무언가를 두드리며 떨어지는 소리. 가끔은 우드드드득, 무언가를 마구 두드리며 떨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쏴아-'하는 소리를 내며, 아파트 벽을, 나뭇잎을 쉼없이 두드릴 때도 있다. 우리는 '아, 비가 오는 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좋다, 라는 생각을 한다. 자연이 자연과 부딪으며 내는 소리들, 자연이 사람[사람이 만든 물건]과 부딪으며 내는 소리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소리를 들으며, '좋다'라고 느낀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소리[음악]'가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그저 '소리'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소리가 음악보다 '좋다'라고 느껴질 대가 있다. 

  봄 비 내리는 밤, 우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땅에서 부터 피어올라 콧속으로 스미는 흙 내음을 맡으며 기분좋게 잠들 때가 있다.


 밤사이 세차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지만,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세차게 떨어지는 비가 내던 빗소리는 사라지고, 고요 속에서 가끔 새소리가 들리고,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고요를 뚫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 아침. 집을 나서며 하늘을 바라보면, 맑고 투명한, 파란 하늘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 날은 왠지 우리의 기분을 즐겁게 만든다.   


  가끔은, 귀[耳]로. 가끔은, 코[鼻]로. 우리는 비[雨]를 만난다. 귀와 코로 만나는 비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전해준다. 비[雨]는 즐거움이다.



3.여행을 하는 중에 만나는 '비'? 

  일상을 살면서 우리는 일기예보에 민감하다. 혹시나 '비'가 올까봐.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걱정이다. 스마트폰 액정 속에 나와있는 세계 각국의 날씨에 먹구름이 잔뜩이니까. 

  비가 오는 날에는 숙소에서 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예정된 일정을 취소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잿빛 하늘. 류블랴나.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여행이 새로워 진다. 우리는 그것을 즐겨야 한다.


  '비'는 그 도시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 그 사이를 뚫고 떨어지는 물방울. 우리는 빗속에서 그 도시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도시의 골목을 적시고 있는 비를 만나게 된다. 카페에 앉아 거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날씨가 맑았다면 절대 하지 못 할 일이다]. '비'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도시의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대부분의 여행 안내책, 여행 블로그들에는 비오는 날의 풍경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낯선 풍경을 통해서, 그 여행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물론 그곳에 머물동안 계속 비가 왔다면, 그곳의 이미지는 '비'내리는 풍경으로 영원히 각인될 것이지만]. 조용한 거리,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를 거닐다 보면, 그 거리가 온통 나 혼자만의 것이 된 것 같다. 비가 오는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이방인의 거리'.


  여행을 하는 데 있어 비가 내리는 것은, 뭔가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비 때문에 카메라를 함부로 꺼낼 수도 없고, 빗방울로 얼룩지고 잿빛 먹구름들로 뒤덮힌 하늘에선 한 줌 빛 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사진도 잘 찍히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의 사진은 찾기 힘들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비가 오는 날 사진을 찍는 대신 사람의 흔적이 씻겨 나가버린 한적한 거리를 거닐어 보고, 가만히 앉아 비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해 보고, 비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이국에서 만들어 내는 빗소리는 우리가 사는 곳의 소리와 뭔가 다르지 않을까?



4.틱(Baltic, 발트 3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거리를 걷다.

  빌뉴스(Vilnius). 하늘을 보니, 구름들이 북쪽으로 마구 날아가고 있었다. 슬로베니아에서, 헝가리에서 만났던 빗방울들이 폴란드를 지나 리투아니아도 와 있었다. 알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빌뉴스 거리에 서다.

도 비가 온다는 사실을, 일기예보에서 봤지만 나는 빌뉴스로 갔다. 

  빌뉴스의 골목들을 걸었다, 올드 타운운 골목 골목을 거닐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지만, 거리는 한산했고, 동유럽 특유의 벽돌길, 벽돌집들이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발틱만의 새로운 느낌, 맑지 않은 하늘, 밝지 않은 거리, 6월 중순이었지만 거리의 노점상들은 털모자, 털장갑을 팔고 있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고, 날씨는 쌀쌀했다. 비오는 발틱, 비오는 빌뉴스의 거리를 걸었고 빌뉴스에 머무는 내내 비가 내렸다. 많지 않는 비, 우산을 쓰지 않아도 그리 많이 젖지 않을 양 만큼. 딱, 그만큼만 비가 내렸고, 가볍게 젖은 몸을 이끌고 커피를 마실 때면, 리트머스지로 물이 스며들듯 커피의 온기가 내 몸을 적셨다.


  리가(Riga). 빌뉴스를 떠나기 전 봤던 일기예보에서는 리가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다. 사람 없고, 자동차들이 멈추지 않아 폐허가 된 국경 검문소를 지나 리가에 도착했다. 비오는 리가 거리를 가로지르며, 리가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밤11시가 넘었지만, 아직 어둠이 오지 않았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지만, 거리는 어두워지지 않았고, 가로등도 빛나지 않았다. 어둡지 않는 거리에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기분 좋게 웃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오는 거리, 어둡지 않은 밤. 술집[pub]에 모여 사람들은 즐거운 기분을 한 껏 토해내고 있었다. 삐걱 거리는 나무 바닥, 물기를 머금은 나무 테이블. 아늑한 기운이 술집에 가득했다. 빗방울 떨

비오는 리가의 거리.

어지는 광장, 노천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광장의 변두리 식당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리곤 빗방울을 바라보며, 비오는 리가의 거리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다.


  탈린(Tallin). 버스를 타고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저 멀리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구름이 버스의 뒤를 쫓았지만 버스는 구름보다 빨리 달렸고탈린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백야(白夜)현상의 탓일까, 밤 12시가 넘어도, 거리는 조금 어두워졌을 뿐, 아직도 어둠 보다는 빛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밤 늦도록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나는 잠을 자기 위해 커튼을 쳐야만 했다. 

  깊은 밤,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구름들이 북쪽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6월 중순, 이불을 꽁꽁 싸매고, 탈린 거리를 향해 힘차게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일도, 비오는 발틱의 거리를 걷겠구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6월 중순, 10도가 채 안되는 서늘한 공기가 어젯밤 세차게 떨어진 물방울들을 양 껏 머금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내일까지 올 것이라고 말했고, 다음날 밖으로 나와 탈린의 거리에 발을 딪고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파랗고 투명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맑고 투명해서,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 같은 그런 하늘. 그리고,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조금은 차가운 봄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았다.


  비오는 발틱 거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오는 탈린의 거리, 싸늘함을 머금고 있는 공기들에 둘러싸여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자그마한 기념품 상점들을 둘러 보았던, 내 인생에서 다시 없을 비오

올드 캐슬, 탈린.

는 탈린의 거리였다. 여름 옷을 걸치고 있던 나에게, 한 겨울 가랑비를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탈린의 거리는 그렇게 떠나갔다.


 햇살 가득한 탈린의 거리, 탈린의 교외에는 어느새 꽃이 피어 있었다. 민들레 풀씨가 나풀나풀 날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고, 이제는  꽃들도, 나무들도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월 중순에 맞는 봄. 며칠 전 밤, 세차게 내리던 비는 봄을 불러내기 위해 대지를 그렇게 힘차게 두드렸던 것일까. 세차게 내리던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포근한 봄기운이 탈린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5.스럽다.

 비[雨], 오는 류블랴나의 거리는 사랑스러웠다. 

비 오는 발틱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그래서 말하고 싶다. 

 사랑스럽다, 발틱 - 빌뉴스, 리가, 탈린.



탈린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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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가득 찬 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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